성장영화의 틀을 빈 퀴어시네마, 또는 퀴어시네마의 틀을 빈 성장영화. 어린 시절부터 함께 자란 쩡싱(Jonathan)과 슈헹(Shane), 그리고 그들의 여자친구인 후이지아(Carrie)는 대학 입시를 앞두고 미묘한 감정의 변화를 겪는다. 쩡싱은 자신이 슈헹을 사랑하고 있음을 깨닫고 후이지아와 거리를 두기 시작하고, 슈헹은...
[11회 부산국제영화제] 영원한 여름 :영화속이야기에 그시절의 나와
지금의 나를 마주하다 퀴어 영화에 대해 그리 좋은 생각을 안 하던 내게
있어 한 장의 스틸에 느껴지는 푸르름에 그만 보고 싶어지게 만든
영화다. STORY 말썽꾸러기 슈헹은 짖꿎은 장난으로 인해 항상 반이
평온한 날이 없다. 그러던 어느 날, 한 여자애가 전학을 온 날, 슈헹은
그녀의 머리카락을 잘라버린다. 그 날 이후, 선생은 반장인 쩡싱에게
슈헹의 마리또가 되어주길 부탁한다. 쩡싱은 선생의 부탁을 승낙하고,
그 날 이후 슈헹의 단짝 친구가 된다. 고교시절, 쩡싱에게는 이성친구인
후이지아가 있다. 서로에게 호감을 지닌 두 사람은 어느 날 학교를
땡땡이 치고는 타이페이로 향한다. 그 날, 쩡싱은 자신이 몰랐던 비밀을
알게 된다. 한편, 쩡싱과 후이지아와의 관계를 질투하는 슈헹은
후이지아를 쩡싱에게 떨어뜨리려다 그만 사귀게 된다. 하지만, 슈헹은
이 사실을 쩡싱에게 숨긴다.이 세 사람의 관계는 점점 더 이상하게
꼬여만 가는데... 이들 세사람은 과연 어떻게 될 것인가? 영원한 여름의
볼거리 두 남자와 한 여자의 사랑과 우정. 그 관계에 대한 이야기 두
남자와 한 여자와의 관계를 보자면, 쉽게 다들 삼각관계를 단정짓기
쉽다. 그러나, 이 영화 속의 삼각관계는 일반적인 삼각관계와는 거리가
멀다. 남자 A를 사랑하는 여자.그 여자와 연인인 남자 B.남자 B를
사랑하는 남자 A.그리고, 남자 A를 친구로서의 감정을 보이는 남자 B.
이 들 세 사람에게는동성 간의 사랑, 이성 간의 사랑, 사랑과 우정이
존재한다.세 사람의 관계에서도 이렇듯 예기치 않은 관계는 서로에게
다른 파장을 미친다. 마치 그 이전 한 영화를 보았을 때 생각했던
모습이 그 시간과 공간을 뛰어넘으니 새로운 모습으로 변한 느낌을 받은
듯 했다.하지만, 현실이라는 관점에서 본다면, 어쩌면 이 미묘한 관계는
이보다 깊지는 않았지만 일찌기 우리 주위에서 한번 쯤 보았을 지도
모를 그 아슬아슬한 모습을 생각나게 한다. 그것이 두 남자와 한 여자의
이야기가 아니라 한 남자와 두 여자의 이야기로도 있을 수 있는
이야기이니까. 그래서인지 이 영화 속 이야기는 흔치 않은
이야기이지만, 실은 그리 낯설지 않은 이야기이기도 하다. 아마도
어쩌면 이 이야기는 사람들이 가슴 속 깊이 남몰래 숨겨두었던
이야기였던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하게 된다. 자신의 정체성과 성장을
담은 이야기 문득 어떤 사실에 대해 나 자신에 대해 되물어 보는 일이
있곤 하다.이 영화 속 주인공들도 어쩌면 자신에 대해 명확한 정체성이
없었던 시절, 그 자신에 대한 정체성과 이를 점점 알아가면서 오는
불안감과 관계에 대한 미래, 이 모든 것들을 담아내고 있다. 이는 결국
한 시절에서 정체되어 있다가 다음 단계로 뛰어넘어 가는 그 때
일어나는 과도기적인 문제이다. 이 때 자신에게 충실하느냐, 그렇지
못하느냐에 따라 사람의 길은 달라지게 된다. 영화 속 세 사람 역시
그와 같은 과정에 서 있다. 아마도 그들이 마지막에 보여준 것에서
다음으로 넘어가는 과정에 대한 몫을 관객에 넘겼지만, 그 선택의 몫은
바로 본 관객의 희망하는 미래의 문이 아닐까 싶다. 그건 아마도 그
시절을 살았던 사람이나 살고 있는 이들이 생각하게 되는 몫이라고
생각되기도 한다. 영원한 여름의 아쉬움 눈에 보이는 이야기 구조 이
영화는 기본적으로 2개의 이야기 구조를 지니고 있다.쩡싱과 슈헹의
어릴 적 이야기와 청년 시절 이야기이다. 이 두 이야기의 기본적인
흐름과 연관성은 너무나 유사해서 그들이 앞으로 전개될 흐름이 예측
가능한 범부이다는 사실이다. 그러나, 이처럼 본다면 영화를 아주
재미없게 보는 것이니 그렇게 보지 말고 자연스럽게 본다면, 그리
문제될 게 없다. 영원한 여름을 보고 <영원한 여름>을 보면서,
<패왕별희>를 떠올리다. 앞서 말한 것처럼, 내가 두 남자와 한
여자의 이야기란 점에서 문득 떠올인 영화가 바로
<패왕별희>였다. 두 남자 사이에 오고가는 사랑과 우정의
미묘함한 남자와 한 여자와의 관계그리고, 한 남자를 두고 갈린 남녀의
질투이 모든 조합이 <패왕별희>의 그것을 연상케 하기에
충분했다. 어쩌면 격변기였던 그 시간과 공간을 초월해 현대에서
산다면그들은 아마이 영화에서처럼 그러한 관계로도 변화되었졌을 지
않을까 하는 생각을 하게 되었던 것이다.사람의 사랑과 질투라는 건
어쩌면 종이 한장의 차이처럼 그 미묘함이 다르게도 표현되기에 그렇게
보였는 지 모른다. 아마도 그건 우리가 함께 살아가야하는 존재이기에
그러한 감정을 느끼는 건지 아니면 본능인지도 모르겠다. 영화 속
이야기에 그 시절의 나와 지금의 나를 마주하다 이 영화에는 사랑과
우정이 존재한다. 하지만, 그것이 사랑과 우정이라고 똑부러지게
나뉘어지지 않는다. 그건 바로 사랑과 우정이란 단어처럼 명확히
구분되어지지 않는 것이 인간관계이기 때문이다. 영화 속 그들처럼,
언젠가 이처럼 미묘한 관계가 아닐지라도 그와 유사한 또는 가벼운
관계를 본 적이 많았기에 이들이 낯설지 않다. 그리고, 이들이 보여준
모습과 보여줄 미래의 모습은 어쩌면 살아가면서 한 번 쯤 보아왔던
주위 속 누군가의 이야기처럼 느껴지기 때문이다. 어쩌면 이들이
보여주었던 모습이 시간이 흘러 성인이 되는 시점에서 사회를 알아갈
무렵 그들은 또 다른 선택의 기로에 설지 모른다. 그건 영화 속 그들이
아직 사회란 벽을 마주치기 전이기 때문이다. 아직 크지 않은 상태에서
그들이 보고 싶어하던 미래를 보고 싶어하겠지만, 그들이 사회란 벽에
부딪히는 그 순간 그들은 마지막 모습에서 보였던 모습이 아닌 또 다른
선택의 순간에 서서 어쩔 수 없는 선택을 하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. 나
역시 어떤 갈림길에 서서 선택을 하고,또 다른 길을 마주할 때 또 다시
선택을 하고,다음 길을 만나기 위해 다시금 선택을 하게 될 것이란 걸
알고 있다. 이미 그들이 거쳐간 과정을 내가 지나쳤기에 그들의 심정의
전부는 아니지만, 일부는 공감했기에 그런 생각을 하고 있는 지
모른다.다만, 그들은 그 길에서 자신만의 길을 선택하길 바라는 것 역시
내가 그들에게 바라고픈 마음이었다. 영화 속 세 사람에게서 그 시절의
나와 지금의 나를 마주하게 된 기분이 든 영화다. ㅍ