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종교적인 이야기를 다루면서 왜 하필 <포도나무를 베어라>인가, 라는 제목 자체에 물음이 들어 보게 된 영화.

<포도나무를 베어라>의 볼거리

- 종교적 구원, 그 근원을 논하다.
이 영화는 카톨릭 자체가 말하는 구원에 대한 내용을 다루고 있다. 신학생, 수녀, 신부, 수사 등 저마다 자신의 방식을 택하여 자신의 종교적 신념을 통해 힘들어하는 중생을 종교의 힘으로 구원하고자 한다. 그리고 고뇌하는 이들을 구원하는 데 있어 몇 가지 물음을 던진다.

종교인이니 단순히 기도만으로 해결할 수 있는가?
힘들어하는 중생과 같은 입장이 되어서 그들을 진심으로 이해하고 난 뒤, 그들을 위해 기도해야 하는 것이 해결책이 아닌가?

이 두 가지를 논점으로 하여 영화는 지속적으로 시험에 들게 한다.

여기서 나오는 모든 이들은 그러한 시련과 고난의 길을 거치고 이를 극복함으로 인해 비로소 진정한 깨달음과 구원을 얻을 수 있게 된다. 비록 그 방법이 자신의 명예와 같은 겉치레를 던진다 하더라도 신념이 있다면 그것 하나로 구원을 할 수 있다는 것이다.

이는 비단, 이 영화의 배경이라고 할 수 있는 카톨릭에만 국한된 것이 아니라 모든 종교적인 구원, 그 근원에 대해 얘기하고 있다.

- 나, 그리고, 모든 이들에 대해 얘기하다
영화의 내러티브는 단순히 주인공을 중심으로 보여지지만, 그를 바탕으로 하여 수많은 이들이 서로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다.

구원에 대한 입장과 신념, 엇갈림 등을 보면 실은 주인공의 모습이 단순히 그 자신에서 머무는 것이 아니라 그와 만나는 모든 이들이 바로 그와는 상황과 모습을 달리한 또 다른 자신의 분신과도 같은 모습을 하고 있다는 것이다.

앞에서 말한 바와 같이
나와 너 사이에 있는 거리만큼
그 거리감을 떼어내면
실은 본질적으로 다를 바가 없다는 것이다.
결국 '나가 너이고, 너가 나이다.' 라고 할 수 있다.
사람을 이해하는 데 있어 그러한 것에 대해 본질적으로 이해하고
사람을 타인의 범주에 놓고 논하기보다는
바로 나 자신이란 범주에서 논한다면
결국은 서로를 이해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것이다.

물론 이 역시 받아들이는 이들에 따라서 어떻게 다른 모습으로 보일지는 모르지만, 정작 그 깨달음이라는 것은 자신으로부터 오는 것이 아닌가 한다.

<포도나무를 베어라>의 아쉬움

- 압축적이며, 간결함에서 오는 갑갑함
이 영화에서 보여지는 것들을 보면 매우 압축적이다. 어떠한 결과가 나왔기에 힘들어하는 이들을 구원했다는 하나의 영상을 보여주기보다는 그 이후의 일을 통해 전할 뿐이다. 아마 이러한 점이 보기에 갑갑함을 주기 쉽다고 본다.

그 부분에서 감독 스스로 대중과 호흡하기보다는 그 자체에 대한 자신의 생각이 너무 강한 탓에 이를 이해하는 범위만큼이나 달라 보이기 쉬운 영화라고 본다.

<포도나무를 베어라>를 보고

- 구도, 그 깨달음에 대해 얘기하다.
이 영화에서 말하는 종교적인 구원은 그저 기도 하나로만 되는 것이 아님을 보여준다.
종교인이라고 해서 권위에 의지한 기도는 그저 말에 불과한 것일 뿐 진심이라고는 볼 수 없다. 영화에서처럼 상대방에 대해 같은 입장이 되어서 서로에 대해 이해하고 진심으로 기원하는 마음으로 기도했을 때 비로소 그 이상의 무언가를 만들어낼 수 있을 것이다. 이는 비단 특정 종교에 해당하는 것뿐만이 아니라 모든 종교에 해당하는 것이라고 본다.

예식과 같은 겉치레를 중요시하기 보다는 내면에 깃들여져 있는 그 마음이야말로 진정한 구도자로서의 자세가 아닐까 한다.   

그러한 의미에서 이 영화는 단순히 카톨릭을 다루고 있다고 해서 단순히 카톨릭만을 위한 영화로 보기보다는 종교적인 믿음과 행동에 대한 그 자체에 대한 모든 것을 담은 영화로 기억된다.

글/ 방콕맨
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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방콕맨 | 평소에는 어디든지 방콕하지만, 영화를 볼 때만큼은 영화관에서 사는 이. 방콕맨입니다.
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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